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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그날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해저터널을 지나 발개라는 곳으로 간 이들은 조금 때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유별나게 물이 많이 빠져나간 갯벌,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갯벌에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조개를 파기 시작했다. <토지 16권. '5부 1권'. 252쪽. 마로니에북스> 조금 때 ----> 사리 ..
"맞는 놈 때리는 놈, 도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없어지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밥그릇 크기를 따져서 생긴 일입니까? 진주서 농청과 백정이 싸웠을 때도 이해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짓밟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의 본성." (…)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 본성, 본성 말입니다. 밥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위냐 너가 위냐, 그것 때문에 더 많이 때리고 맞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구요. 재물이나 권력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등이면 굶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다 많은 재물, 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는 것은 실상 배고픈 것하고 절실하게 관계되는 것..
송관수는 치열하게 살다 갔다. 신분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인간의 존엄을 외쳤다. 그는 형평사운동, 노동자파업, 독립운동에 관여하며 세상의 모멸로부터 그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 했다. 관수는 농민이었지만 백정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백정이란 굴레를 뒤집어썼다. 그 굴레가 대를 이어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자 깊은 좌절과 자기 비하에 빠진다. 하고많은 것중에 천대와 차별만을 자식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부모의 한이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송관수의 저항의식은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양반들이나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그는 왕의 편도, 민족의 편도 아니었다.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의 편에 서서 그는 강쇠와 함께 싸웠다. 관수는 가슴에 못박힌 장남 영광과의 재회를 앞두고 만주에서 콜레라로 죽는다. 한편..
"봄아 봄아, 우찌 그리 더디 오노. 고봉준령 넘니라고, 허리 아파 쉬니라고 더디 오나. 산 밑에는 명춘화 산수유도 피었일기고 까치는 안짱걸음 걸음시로 고개 넘어 손(客) 온다고 까까 거릴 긴데 첩첩산중 이골짝은 우찌 이리도 적막강산인고." (…) 춘매는 봄이 더디 온다고 푸념하곤 했었다. 그러던 춘매도 이른 어느 봄날, 꽃바람에 할미 죽는다는 말을 뇌면서 세상을 떴는데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어찌 됐든 차면 달 기울듯 올 것 오고 갈 것 간다. 으레 그런 줄 알면서도 봄을 기다린다. 님이든 독립이든, 저절로 즐거워지는 정말 그냥 봄이든 그러니까 봄에 투사하는 마음과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그 속도에 대한 감각도 상대적이다. 소설 에는 작가의 일본론을 비롯해서 귀 기울일 만한 사유..
"신비와 현실적인 두 관념을 수용한 것에 한(恨)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본 말로는 한을 원한으로 쓰고 그것은 복수라는 묘하게 엽기적인 분위기를 갖는데 우리가 말하는 한에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한이 된다, 한이 맺혔다, 할 때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빼앗겼든 당초 주어지지 않았든지 간에 결핍을 뜻하고, 한을 풀었다, 할 때는 채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해서 결핍은 존재할 수 없는 방향으로, 채워졌음은 존재하는 방향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생명 자체에 관한 거예요. 한은 생명과 더불어 왔다 할 수 있겠어요. 한의 근원은 생명에 있다 할 수도 있겠어요. 흔히 지옥이다 극락이다 하는 말을 쓰는데 하나는 공포의 상태, 하나는 안락의 상태, 그것은 정지된 상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극..
"지난날을 생각허믄 모두가 다 후회스러운 일뿐인디 그 후회스러운 날들이 그립단 말시." "이제는 나이도 들고 했는데 편키 살다 가야 안 하겄소." "주막 뜯어 개여라 그 말인디, 넘들도 그런 말 많이 허지라. 그러나 사람 못 보고 워찌 산디야? 오는 사람보고 가는 사람보고 날아가는 까마귀보고도 내 술 한잔 먹고 가라 하고 접은디, (...)" 먼 길 가다보면 피곤하다. 독서도 마찬가지.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책이 안 읽히는 날도 있다. 그런 날 영산댁의 말이 정답다. 여봐란듯이 어깨 펴고 걷지 못한 지지부진, 더딘 인생들 예외 없이 받아들였을 주막에 다 늙은 영산댁이 있다. 함께, 술 한잔 하고 싶다.
"애국, 애족만 내세우면 범죄도 해소되는 그 기만을 수긍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민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부정했을 뿐이야." (…) "애국심이나 국수주의는 출발에 있어선 아름답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해지면 질수록 추악해지고 비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빼앗긴 자나 잃은 자가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또 민족주의를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끼 들고 강탈한 자의 애국심, 민족주의는 일종의 호도 합리화에 불과하고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흔히들 국가와 국가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엔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 말은 국가나 민족을 업고서 저지르는 도둑질이나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하..
조용하하고 결혼을 생각한다. 얼레설레 아차! 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결혼. 그가 귀족이 아니었고 자산가가 아니었고 교욱받은 신사가 아니었고, 그랬다면 과연 결혼이 이루어졌을지 그것은 의문이다. 차디찬 분빛과 창백해 보이는 지적인 용모에 명희 마음이 조금은 끌렸던 것을 부인..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 쓰라렸던 것. 그것은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 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
"참꽃(진달래)술도 그게 기침에는 영약인디." 이불을 개켜낸 자리에 걸레질을 하는 숙이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걸레질로 지우며, 영산댁에게 등을 보이며 구석지를 닦는다. (…) 천만병을 고친다는 진달래술. 아비의 병이 천만은 아니었지만 목에서는 항상 가래가 끓었고 끊임없는 기침, 기침의 끝에는 피를 토하곤 했었다. 봄이 되면 더욱 기침은 심해졌고 피를 토하는 도수도 잦았다. 봄마다 봄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말을 들어야 했었다. (…)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었는가 솥뚜껑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솥전에 떨어져 피식피식!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난다. 숙이는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눈물을 닦고 더운물을 퍼내어 걸레를 빤다. 춘궁기가 아니어도 살길이 막막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