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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C는 그때 스웨덴에 살고 있었다. 요령과 힘만 있다면 얼마든지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차갑고 단단한 겨울이 오랫동안 녹지 않는 곳이었다. "나 지금 스웨덴이야." 동떨어진 곳이 필요했던 나는 쉽게 빈자리를 찾을 수 있는 넓지 않은 카페에서 20크로나짜리 커피를 마시며 C에게 연락했다. C는 팔짱을 끼고 지그시 노려보듯 잠시 말이 없다가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목적지가 어디야?"라고 물었다. "잠시 머물 수 있다면 어디든 목적지지." "여전하구나, 나른하고 시니컬한 태도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C가 왔다. 코트를 벗자 C의 탄력 있는 몸매가 매끈한 부츠와 모직 원피스 차림으로 드러났다. C의 깐깐한 성격처럼 여전히 군살은 잘 정리돼..
베란다에 빈 화분이 하나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 어린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묻자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빈 화분 그동안 실어 나른 목숨이 몇이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면 나를 옮겨 담은 화분도 아득하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 가족, 학교, 군대, 사랑, 일터, 오 대~한민국! 결국엔 우리 모두 지구 위에 심어졌다는 생각 목숨 붙은 걸 함부로 맡는 법 아니라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겁도 없이 생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는지 빈 화분 그 오랜 공명이 아직 씨 뿌리지 못한 빈 몸을 울리고 지나간다 어찌하여 화분은 화분이 되었는지 김정용 시집 『메롱메롱 은주』에서 얼마 전에 함께 사는 반려식물이 생기를 잃은 잎 두 개를 내가 놀라..
늙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밥 먹자, 하신다 오늘은 그 말씀의 넓고 평평한 잎사귀를 푸른 벌레처럼 다 기어가고 싶다.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 같은 말씀 원뢰(遠雷) 같은 부름 나는 기도를 올렸다, 모든 부름을 잃고 잊어도 이 하나는 저녁에 남겨달라고 옛 성 같은 어머니가 내딛는 소리로 밥 먹자, 하신다 문태준 시집 『먼 곳』중 전문. 소설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옛·날·과·똑·같·은·모·습·으·로…' 그랬다, 옛날을 알아볼 정도로 살아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
오늘 하현달까지의 거리는 대략 363,297 킬로미터. 달 쪽으로, 달 쪽으로, 안 보는 척하면서 발꿈치를 들었다. 몇 센티가 가까워졌다.
김 서린 욕실 거울을 손으로 닦을 때 드러나는 내 얼굴을 향해 말한 적이 있다. "너도 이제 고3이다." "너도 이제 서른이다." "너도 이제 마흔이다." 내가 웃어야 웃고 내가 물어야 물으며 단 한 번도 아니라고 먼저 말하지 못하는 거울을 보며 어제도 한 생애를 지지부진한 남자가 거울 속 사내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호시절은 다 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백설 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의 거울처럼 결국 사람은 착각의 크기만큼만 행복하고 그 행복이란 타협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직은 괜찮다'라는 착각이 나를 추연히 안심시켰다.
#1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었다. "이제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편히 쉬는구나 죽으면. 아, 나도 좀 일찍 죽었더라면 편히 쉬고 있었을까. #2 좋은 영화는 노트북으로 봐도 좋고 IP TV로 봐도 좋으나, 일반 영화관에서 보면 좀 더 좋고 아이맥스나 4D로 보면 더더욱 좋다. 세계 최대 IMAX관이라는 CGV 용산은 부족한 게 별로 없다. 그곳에서 를 보면 다른 아이맥스 스크린의 두 배에 달하는 화면발과 음향이 몰입도를 확장하기에 약간은 좋다. 그런데 일반 영화관에서 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그 장점이 모두 사라진다. 하물며 다른 디바이스에서는. 세상은 일사불란하게 '피에타'를 명작으로 납득하지만 신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죽어간 예수에 비해 지나치게 젊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
오래된 것들을 버린다. 다 끌어안고는 살 수 없으니 현명한 선택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2년 된 스마트폰. 3년 된 옷과 애인. 5년 된 차와 가구. 7년 된 책. 10년 된 집. 그런 건 일도 아니라며, 80년 된 사람은 요양병원에.
#1 8월의 마지막 날 상현달 까지의 거리는 대략 405,010km. 여기서도 너무 선명한 달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너는 도대체 얼마나 먼 것이냐. #2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계획이든 부주의든, 알고서도 저질렀다면 참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거잖아. 그때는 부모라는 사람들도 철이 없어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모르고 낳았을 거야.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3 오후 한때 흐린 어느 날, 등을 둥글게 모은 초승달이 저녁 하늘을 발자국 투명하게 걸어갔다. 그 큰 하늘도 달 하나 살기엔 적당한 공간처럼 보였다. 가만 보니 내 달 옆에서 올바른 지점에 위치한 잘 닦인 별 몇 개도 반짝. #4 신호에 멈춰 서서 바라본 사방이 문득 애매했다. 무사고 운전으로 착실히 주행거리는 늘리는데 정작, 나..
화면이 어두웠다. 마치 새카맣게 타 숯덩이가 된 마음 같았다. 주인공이 영화를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다. 입만 열면 나올 소리가 상당히 절제됐다. 그 대신에, 대사보다 더 명확하게 들려오는 건 주변의 소리였다. 파도와 바람 소리, 옆방에서 들려오는 벽간 소음과 일상의 이런저런 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