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분류 전체보기 (199)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셀리 호킨스의 연기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지켜보려 극장에 갔다. 오늘 개봉한 영화의 첫 회를 선택했다. 영화의 플롯은 전형적이다. 이질적인 것과의 사랑은 '킹콩'이나 '미녀와 야수' 같은 작품을 통해 꽤 익숙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남성성이 내재한 괴생명체와 그에게 연민하고 공감하는 아름다운 여성성이 등장해 폭력에 저항하고 치유의 역할을 하는 내러티브는 그동안 자주 변주되고 애용되었다. 문제는 설득력이다. 소재 선택이 촉발한 기시감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연출자의 역량이다. 영화는 마치 을 보는 듯 했다. 우아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와 원색에서 조금은 톤 다운된 색채로 생략된 대사를 오히려 풍부하게 표현한 화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다채롭고 세련된 기조를 시종 유지하는 것을 보는 것과 적절한 자리마다..
살면서 내가 내 주관적 잣대로 선정해 지독히 편애했던 어떤 옳음과 어떤 훌륭함과 어떤 멋짐에 그러했듯, 앞으로 나는 그녀가 글로 자아내는 정취를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사랑할 것 같다. 그녀의 첫 시집을 기다린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
대개 영화와의 만남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간혹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보는 영화가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드문 경우다. 어쩌다 들춰보기는 해도 같은 명작을 두 번은 읽지 못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래도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 깊게 각인되는 영화는 있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은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는 그런 영화다. 다른 인종, 다른 언어, 다른 음식, 다른 세계. 그 낯섦을 수용하는 장면이 따스했다. 는 옴니버스영화처럼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개별세대의 집합체인 아파트가 그렇하듯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한덩어리로 보인다. 극을 이끈 배우들도 같은 영화에 공존하지만 서로 만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는 덜컹거리거나 단절됨이 없다. 오히려 화면 곳곳에 유머를 펼치..
영화는 언뜻 보면 B급 패러디물 같다. 만화의 '데포르메'처럼 연출은 의도적으로 과장되었다. 그동안 많은 영화가 차용한 "어서와" "다녀왔어요" 의 결말로 매듭짓는 '타다이마 클리셰'는 선하게 살면 천국이나 윤회가 기다린다,는 종교적 형식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인간으로 ..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
완전 쒼남! 노래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발음과 속도와 선율이라 귀에 쏙 들어온다. 가족 형태가 다변화하는 시대에서 삼대를 아우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불투명해지는 먹이사슬 관계를 명랑하게 포괄하는 동요가 참 유쾌하다 무심코 동요 전반부에서는 신..
물 어머니학교 12 티브이 잘 나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놓으면 안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에다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겄다. 뭐가 그리 슬퍼..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 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이정록 시집 『정말』 중 전문. 한 몸이었다가 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