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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아하, 욕실 바닥을 치며 웃는다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마는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소리로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디, 어디 없을까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광천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어른이라서 부지런한 게 아녀 노심초새한테 새벽잠을 다 빼앗긴 거여" 두 번이나 읽은 조간신문 밀쳐놓고 베란다 창문을 연다 술빵처럼 부푼 수국의 흰 머리칼과 운동화 끈을..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운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정록 시집 『정말』 중 전문. 여자는 행복을 단념..
시 어머니학교10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
1. 의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응급 헬기 안은 아닐 것이다. 피와 변을 보고 만지는 수술실도 아님은 외과 기피 현상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군인에게 가장 안전한 곳도 적에게 노출되는 야전이 아님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2. 북에서 한 남자가 선을 넘어왔다. 상황에 따라 진보이거나 보수인 나는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데, 어떤 이가 넘고자 하는 선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선이었다. 일부 정치인들이 그를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때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그를 살리기 위해 군인들과 의료진의 앞뒤 가리지 않는 고투가 있었다. 3. 줄을 잘 서야 하는 건 한국사회의 금과옥조다. 주류 사회가 받아들일 경로를 밟지 않으면 인생이 순탄치 못하다. 거칠게 말하면 쪽수가 많은 쪽, 그..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을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중 전문. 더는 꽃게를 먹을 수 없었다. 시에 배인 외면하기 힘든 울음 때문이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불 끄고 이불 덮듯 보듬으며 잔인한 생과 불화하지 않는 모습에 입맛은 지워지고 하찮고 사소한 것들의 불행이 돋아났다. 우리 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항시, 숱한 것들의 낙담과 희생이 있었다. 갑이 을..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 전문. 더러 이 생에서 잘못을 자초한 사람 곁에, 잘못 없는 낙엽이, 잘못 놓이지 않은 글자가 나란히 시가 되어 앉았다.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목제 인형이 있다.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는 구조인데 하나를 열면 그 속에 크기가 더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다. 정교하게 제작된 제품은 마지막 인형의 크기가 핀셋으로 집어야 할 만큼 작다. 안철수 씨는 마트료시카 같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작아지는..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각색해 교묘히 서술자의 위치만을 높이는 시들이 많다. 그런 시는 식초처럼 시다. 어떤 시는 새로운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시다 못해 산도가 너무 높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다. 비판의식과 도덕 강박을 내세우는 경향..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보름째 같은 꿈을 꾸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반복되는 꿈 때문에 하룻밤에 몇 번씩 잠을 깼다. 그사이 체중은 5kg이나 줄었다. 그가 집안일 때문에 고향에 갔던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러 잘 먹지 못하는 술까지 마시고 잠들었지만, 여지없이 동일한 꿈을 꾸다 깨었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자다가 저절로 새어 나온 한숨 소리를 들은 그의 동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요즘 걔가 자꾸 꿈에 보인다." 그가 말한 여자는 그와 헤어진 지 십 년이 지난 옛 애인이었다. 두 사람은 십 대 후반에 만나 청춘을 다 쓰며 사랑한 사이였는데 남자의 동생과도 허물없이 지냈었다. 그가 최근의 일을 말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에 저도 봤어요. 어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