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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노인은 어디서 오는 길이라?" "어디랄 것 있소, 조선 팔도 뜬구름같이 다니니." "객지바람을 많이 쏘였으면 아는 것도 많겄소이." "아는 게 뭐 있겠소 그저 인심을 알 뿐이지." "그란께로, 인심을 안다면 아는 거 아닌게라우? 그래 워디가 젤 인심이 좋습디여?" "젤 좋은 곳이 어디 있겠소. 오..
눈은 싱겁게 멎어버리고 하늘은 개기 시작했다. 길가 삽짝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오돌오돌 떨면서 앉아 있었다. 석이 그 앞을 지나친 뒤 강아지는 우우 하고 짖어보다가 그것도 싱겁게 그만둔다. 우물가에는 아낙이 보리쌀을 씻고 있었다. 소매 끝을 걷어 올린 두 팔뚝이 빨갛다. 석이는 ..
'나는 누굴 위해 비단옷을 입었나. 내 가장 내 자식 등을 덮기 위한 길쌈이라면 주양장천 긴긴 밤도 길지 않을 것을.' 세월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지나간다. 사람들, 흘러가버린 사람들, 남아 있는 사람이 지나간다. 무리를 지어가는 얼굴들, 그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지나간다. 외롭게 홀로..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임종을 앞둔 월선과 용이의 마지막 대화다. 월선은 소설 의 소화처럼 무당의 딸이다. 천한 신분이라는 오로지 그 이유로 용이와 맺어지지 못했다. 소화가 고문을 받아 유산하는 고통 속에서도 하염없이 정하섭..
한참 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으다. 우떡허든지……." "……." (…) "멩이 붙었다고 머 고마울 것 하낫도 없다. 윤보형님은 그렇기 잘 죽었지. 죽을 때 말마따나 육신을 벗어던지고 훌훌 잘 날라갔지 머." 사십이 넘은 두 사내는 별빛을 밟고 주거니 받거니, 헤어질 줄 모르고 간다. 서로의 마음에 친구 이상의 것이 짙게 흐르고 있다. 한 살갗 한 피 같은 것이,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그리움, 그것은 서로를 통하여 고향을 느끼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쩌다가 고향을 잃었는가. 간도로 피신한 용이와 영팔이가 헤어지는 장면이다. '고향'이란 단어가 단순한 지명으로 읽히지 않는다. 우려할 일은 고향을 떠나온 게 아니라 다른 유형의 고향을 상실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저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 새 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어쩌면 금녀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삶이었었는지 모른다. 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 그 긴박한 찰나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
"도시 은혜란 뭡니까? 양반들 먹고 남은 찌꺼기를 던져주는 게 은혭니다. 상놈 노비들은 먹다 남은 찌꺼기를 얻어먹으면서 감지덕지 은혜를 받는 게지요. 나는, 나는 말입니다. 돌아가신 마님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괴팍한 서방님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서방님은 어린 ..
병풍은 양면을 다 쓴다. 회갑 때 축수의 용도와 축하연에도 쓰고, 제사와 초상 때에도 사용한다. 병풍은 접거나 펼 수 있다. 2폭에서 12폭까지 그 길이가 가변적이다. 때론 까마득하고 널리 어중간하다. "삶과 죽음의 거리가 2.5센티" "젖 먹던 입부터 숨 거두는 콧구멍까지도 병풍 두께 2.5센티"라고 이정록 시인이 썼다. 빛과 어둠, 남과 여, 사랑과 이별, 안과 밖, 삶과 죽음, 동전의 양면처럼 멀어 보이는 것들이 실은 가장 가깝게 붙어있다.
그녀와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것과 페니스가 흐물거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영화는 아무도 오래는 머물지 않는 공항에서 불일치를 드러내며 시작한다. 불특정 소음이 가득한 곳에서 여자는 남자를 부르지만 방금 도착한 남자는 자기 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뿐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유리벽이 있어서 볼 수는 있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는데, 이혼과 불리의 불가피성이 그렇게 남자와 함께 나타난다. 아무튼 남자는 당연하게 따라 나올 줄 알았던 수화물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영화는 과거를 뜻하는 타이틀을 자동차 와이퍼가 지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와이퍼는 바깥에서 작동한다. 예측하지 못한 날씨처럼 삶도 내부보다는 낯선 것들이 가득한 외부에서 삐걱대고 부딪히고 돌보고 살피며 전개된다. 영화는 진행과정에 적잖은 난관이 있음을 슬쩍 내비치며 시동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