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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 윤여정 씨는 유머를 적절히 섞은 소감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는 아마도 본인 인생에서 가장 큰 보상이자 인정이며 극적인 무대였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털털하게 웃었다. 그 짧은 순간 잘생긴 남자 브래드 피트에게 농담을 건네고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이 악물고 산 세월을 쿨한 유머로 돌아보며, 함께 후보에 오른 이들을 진심 어린 언어로 배려하는 모습은 그녀가 단순히 연기만 잘하는 배우에 그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2. 시상식은 언제나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노력한다지만 상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간다. 수상자와 비수상자의 심리 상태와 간극은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수상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나머지는 애써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수상자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
1. 윤여정 씨가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미국 자본과 미국인이 만든 영화이고, 미국의 영화제이지만 수상 소식은 놀랍고 기쁘다. 그의 수상소감도 인상 깊다. 외국 여행하다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무슨 유명인도 아니면서 모처럼 익명으로 즐기는 자유가 산산이 박살 난 듯이 어색하고 반갑지 않은데 한국 기업 광고판은 되게 반가웠다. 한국에서는 매일 봐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도 장소가 다르면 의미도 다르게 다가왔다. 윤여정 씨의 수상 소식을 대하는 마음도 그와 비슷한 느낌이다. 2. "저 세대는 무슨 재미로 살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세상사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던 풋내기 시절에 나는 내 부모 세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손가락질 하던 그 지점에 나는 지금 와 있다. 이 나이..
#1 3년 전에 약 45센티 크기의 식물을 선물 받았다. 그 녀석은 지금 키가 120cm로 자랐는데 앞으로 20cm만 더 크면 생장점(성장점)을 자르려고 한다. 위로 크지 못하게 된 녀석은 분명 양옆으로 가지 두 개를 뻗을 테고 목질화가 진행 중인 밑동도 점차 굵어지겠지. 새로 나올 가지 두 개가 약 30cm 정도 자라면 그 또한 잘라서 가지를 네 개로 만들고 먼저 자란 잎들은 미련 없이 정리해 외목대 수형으로 다듬을 생각이다. 살아 숨쉬는 식물 막대사탕이나 솜사탕 형태로. #2 "재밌는 얘기 아니면 하지 마!" "블로그에 또 정치 얘기네?" 한때는 공권력이 방송, 영화, 서적 등의 표현 내용을 모조리 검사했다. 권력은 그들이 부적당하고 여긴 모든 표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일테면 "국민정신을 해이하게 ..

↑영화 시작 전. 스크린 양옆 커튼이 접히고 화면 크기가 커지며 영화가 시작한다. 1. 극장은 한발 물러서야 볼 수 있는 세계다. 스크린과 일정 거리를 두어야 영화가 골고루 보인다. 거리가 너무 멀어도 선명도가 떨어져 세부와 생생한 현장감을 놓친다. 2.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 이야기를 다뤘다. 사람은 너나없이 익숙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 용케 살아남는 서사를 쓰다가 생을 마친다. 식물의 씨앗이 모체를 떠나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르는 천신만고 끝에 뿌리를 내리고, 이민자가 모국을 떠나 낯선 세계서 가까스로 정착한 서사도 그와 유사하겠다. 3. 부부의 세계 또한 이민자가 마주하는 환경처럼 각자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이 '이민'이라면 '결혼'은 자기를 떠나 다른 ..
몸 활짝 펴고 봄바람 실컷 쐬는 한량 노릇 하려니 날이 몹시 차고 매섭다. 비거스렁이 하는 바람 샤워 덕에 미세먼지는 말끔히 씻겼는데, 잔뜩 심술 난 바람은 매화 머리끄덩이를 인정사정없이 움켜잡고 흔든다.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 당장 내 멱살이라도 붙들 기세, 내 옆에선 남보다 일찍 발랑 까진 목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와들와들 떤다.
#1 포털에는 온종일, 아니 1년 365일 실시간 교양 없는 언론의 그림자가 분노와 절망을 생산한다. 검찰과 언론 등 요사스러운 무리들이 요란한 말과 복장, 몸짓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없는 일 있는 일로 둔갑하고 작은 일 불려 크게 말한다. 경쟁에 지치고 나이 먹어 무거운 이들의 공허한 마음을 트로트가 유혹한다. 고난 끝에 황제에 오른 유비와 같은 드라마가 필요한 시청자들은 자신이 무명가수를 스타로 만들어내는 듯한 재미를 즐긴다. 그 사이 조중동과 종편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윤석열 영웅' 만드느라 바쁘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요물이자 독극물인 조선일보는 급기야 관상까지 들먹이며 왕 만들기에 나섰다. 가히 샤머니즘 시대로의 퇴행을 보는 듯하다. #2 엄마가 배추김치 한통을 보냈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남..
1. 윤석열 씨가 사퇴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권력기관 공무원의 사직이 약을 팔려는 약장사의 쇼처럼 떠들썩했다. 아마도 그는 지난해 총선 전에도 그랬듯이 다가오는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날 대구를 무슨 출정식 하듯 요란스럽게 방문했는데 역시나 마지막까지 사사롭고 정치적이었다. 2. 총장 재임기간 내내 윤석열 씨는 거칠고 엉뚱했다. 조국 씨처럼 손봐주리라 벼른 사람은 막강한 검찰권을 동원해 일가의 인격과 인생을 짓밟고, 김학의 씨처럼 봐주고 싶은 사람은 사건의 본질보다는 도피를 막은 공무원을 범죄자로 내몰았다. 3. 그는 꼼수에도 능하고 염치가 없다. 재소자를 겁박해 없는 죄를 만들어낸 검사를 감찰하려는 임은정 검사를..

영화 한 편 소비하는 일이 갈수록 쉽다. 극장에 가지 않아도 아무 때나 넷플릭스나 아마존 등에서 골라 보다가 영 내키지 않으면 도중에 그만둔다. 영화 한 편 퍽 쉽게 잊힌다. 대개의 영화는 특별하지 아니하여 예사로운 예측 안에 머문다. 대체재가 시장에 널린 영화의 유효기간은 짧고 영화와 사귄 추억도 바삐 사라진다. 흑백 영화 "위 아 40"은 다채로웠다. 캐릭터의 매력과 찰진 대사, 빼어난 편집 역량이 유머와 함께 흑백 영화 구석구석을 빛냈다. 인간의 노화는 사실 아무리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외쳐도 슬픔이고 때로 수치이며 공포다. 감독은 그 무거운 주제를 목청껏 18번 부르듯 제대로 통제하며 탄력과 활기, 자신감과 재생력을 잃어가는 중년의 이야기를 쾌활하게 그려냈다. 인내심 부족한 내 엉덩이도 영화에..
"문빠 현상이 노무현에 대한 집단적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홍위병 정치’, ‘문민 독재’, ‘반지성주의’라고 비판하는 소위 정치 전문가들은 그 현상에 대한 진단에 있어서도 대응에 있어서도 모두 틀렸다. 문빠들은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마땅히 이끌어내야 할 교훈, 즉 비판적 지지의 신화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냈다.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며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노무현 정부의 소소한 실수나 한계를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가 보수 언론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을 때 정치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답시고 뒷짐 지고 있던 비판적 지지 세력은 노무현 정부에 적대적인 보수 세력만큼, 아니 그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절감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차들이 폭설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나보다 재빨리 현명한 친구는 엉금엉금 기어 새벽 두 시에 겨우 귀가했다는데 나는 나사 하나 빠진 놈처럼 입 헤 벌리고 눈구경을 하였다. 그 언젠가 한 부스스한 사랑이 생각나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사랑만으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몰라서도 아니고, 그냥, 함박눈 오는 날엔 원하는 순간에 적시타 터지듯 "눈이 나리네"라며 읊조리는 타이밍이 좋아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첫 발자국 새기는 이 노래 듣는 멋 있어야 겨울이다 싶어서. 벚꽃 흩날리는 날 봄볕 오래 쐬듯 함박눈 맞았다. 잔사설 그만두고 눈 수북이 쌓인 밤길을 걸었다, 보드득 보드득 보드득.
1. 이낙연 씨가 정초에 난데없이 사면론을 들고나왔다. 그는 '이명박, 박근혜' 씨만을 콕 찍어 구제해 주자는데, 나는 새해 첫날부터 궂은소리를 들은듯 기분이 언짢았다. 서울대 출신 후배들에게만 유난히 다정하고 다른 이에겐 가혹하리만큼 엄격하다더니, 그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보다는 제 마음에 근거해 선별하는 일을 좋아하나 보다. 2. 재난지원금도 홍남기 씨와 손발을 척척 맞춰 선별지원을 고집하더니 뒤늦게 내놓은 대책은 한심스러웠다. 방역 전쟁에서 누군가는 안전한 후방에 있고 누군가는 보급이 끊긴 최전방에서 독박을 쓰고 있다. 3. 코로나19 방역은 의료진 덕분이다. 또한 여러 사람이 흘리는 피눈물의 대가이기도 하다. 의료진은 명분과 보람을 얻고 얼마간의 보수라도 받지만, 소상공인, 특수고용직, 고용취약..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오규원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중 전문 1. 온갖 이야기들이 모여 내 이불속으로 쑤욱 기어들어 오는 밤이 있다. 그들이 꼼지락거리고, 흐뭇하게 웃고 떠들다 문득 얼굴이 찌푸려지는 희미한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리면 낯이 뜨겁다. 2.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가. 돈 몇 푼에 치사해지고, 팔은 안으로 굽고..
1. 오십 대인 가수 강산에 씨가 수능을 막 끝낸 청소년들에게 노래를 들려준다.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아이들은 설레면서도 부모가 챙겨주는 안락한 삶을 떠나야 해서 뭔가 모를 불안감과 책임감이 안개처럼 깔리는데, 자기가 몸담은 분야에서 산전수전 두루 겪었을 강산에 씨가 부르는 노래는 그에 대한 격려로 들린다. 2. 나이든 사람들이 모이면 온통 부동산과 돈 얘기 뿐인 한국에서 나잇값 하는 어른으로 살려면 가슴에 열정보다는 매우 정밀하게 작동하는 계산기를 지녀야 한다. 3. 내가 만약 강산에 씨처럼 어른들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을 만났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태어나면서 이미 재능과 부모의 경제력 등 기본값이 차이가 나는 아이들에게 '넌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인생역전을 호언장..
1. 법관이 증거와 법리에 근거해 판결해야지, 왜 반성과 양심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실체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양심과 반성에는 믿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어서 증거와 법리를 따진다. 그것이 법치다. 판사는 징역 4년에 법정구속을 선고한 후 정경심 씨에게 '소감'을 물었다는데, 나는 그 행태가 법원과 검찰에 만연한 극단적 자기 중심성과 공감능력 결여, 반 사회적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소시오패스적 특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2. 사극에서 탐관오리가 다짜고짜 "네 이년!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윽박지르는 광경이 떠오른다. "저 년을 매우 쳐라!"라고 차마 발화하지 못한 속엣말도 들리고. 그런데 이 나라의 지엄한 사법부는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운영하며 아동 ..
어제는 입이 써서 홍합 국물에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술 담배 끊은지 십수 년이라 하는 수 없이 연신 커피만 마셨다. 검찰과 법원에 똬리를 튼 독사들의 수사와 판결은 징그러워서 소름이 돋고, 치사하고 졸렬해서 헛웃음이 나왔으나 법비들이 꺼내 보인 강렬한 살의만큼은 연쇄살인범의 범행 현장을 보듯 섬뜩했다. 그 와중에 득달같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말 잔치판을 벌이며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횡설수설 되는대로 지껄이는 언론과 진중권 씨 같은 사람들도 보았다. 그들의 살의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엊그제 만난 목련나무는 벌써 속을 단단히 채운 꽃눈을 만들고선 동짓날을 사뿐히 뛰어넘었다. 목련나무는 허름한 부엌에서 자식들 입에 들어갈 음식을 어떻게든 만들어내던 어머니처럼 때맞춰 꽃을 날래게 피워낼..

박경희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중 전문 이승에서는 어떻게든 꿈을 이루려 눈코 뜰 새 없이 일손을 놀리더니 저승 가서도 뭐 하느라 바쁜지 코빼기도 디밀지 않더군요.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라고 트집을 잡아 따져묻고 싶은데, 어느 날 꿈에 잠시 틈내어 다녀가면 그늘진 마음이 불을 밝히지 않아도 환해져요. 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언감생심 나도 앙큼한 꿈을 꾸었지요. 네, 나는 겉으로는 얌전을 떨면서 속으로 호박씨를 깠어요. 만약 꿈에서 깨지 않았더라면 결정적 장면이 뒤이었을 거라고 입맛을 다시지만, 어머니의 백일몽도 감질나게 뜸만 들이다 끝났나 봐요. 그래요, 필요할 때 없거나 모자라면 안타까워요. 어떤 꿈은 악몽이어서 꿈속에서도 깨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꿈을 깨면 한낱 꿈이어서 서운하고..
1. 주 3회 하던 스피닝을 1주일 내내 했다. 스핀 바이크를 고강도로 미친 듯이, 뜨겁게 탔더니 허벅지는 딴딴해졌는데 어제는 몸이 하루 종일 께느른하였다. 무릎도 시큰해서 나는 만사를 제쳐 두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럴 땐 '잠'만이 심신기능 저하상태에 빠진 나의 전부를 바꿔놓는다. 나는 불을 끄고 수면안대를 하고 누웠다. 곤히 잠든 고양이. 모로 누워 자다가 무슨 꿈을 꾸는지 앞발을 몇 번 꼼지락거리다 아예 넘늘어진 개처럼,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도 깨질 수 있는 연약하면서도 견고한 평화 같은 단잠을 잤다. 2. 새벽에 일어나선 여느 때처럼 커피머신 고압펌프 작동음으로 정적을 깨고 되직한 스파게티에 물을 조금 부어 걸쭉하게 만들지만 그 농도는 묽지 않게 조절한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
1. 코로나 덕분에 12월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각자의 피치 못할 사정에도 시간만큼은 흐지부지 흘렀다. 며칠 전 새벽에는 눈이 왔고, 나는 어둠 속에서 커피머신으로 한때의 잔상을 녹여 사진이나 글로 추출하듯 에스프레소 두 번, 룽고를 한 번 내려 마시며 새벽 특유의 정감에 덜미를 잡힌 채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두 번 들었다. 2. 한 번은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음반이었고 두 번째는 로저 노링턴의 지휘에 귀를 기울이며 어스레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악 문외한인 나는 지휘자의 자리바꿈에 따른 음악의 인상 변화를 확연하게 느꼈다. 유명 지휘자들의 해석보다 템포가 빠른 그들의 지휘가 빚은 소리는 귀를 거쳐 가슴속까지 흘러들었다. 그 소리는 맹렬한 기세로 대양을 헤엄치는 참치처럼 질주하였고, 어느 마..
부산서 출발한 KTX가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이 올라 타자 열차 안 분위기가 금세 달라진다. 디테일을 가차 없이 뭉개거나 생략한 트럼프의 단문 같은 짤막한 언어가 동대구역에 도착하기 전과는 전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도통 눈치도 없이 자기 할 말은 다하고 보는 그들은 말을 툭툭 내던지는데, 그들의 말과 행동은 걸리거나 막힘이 없지만 승객들은 파김치처럼 톡 쏘는 자극성이 강한 억양에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자리를 잡은 그들은 저렴한 섬네일과 언어를 마구 쏟아내는 정치 유튜브를 이어폰도 없이 보더니 여러 사람 들으라는 듯 단호하게 내뱉는다. "문재인 그 개**는 감옥에 가야 돼!" 어느 편에 선 사람들의 편협한 주관성과 옹졸한 일관성이 벌이는 처연한 소동에서 나는 내가 사는 세..
1. 유럽에 가면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우뚝 솟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저만 잘났다고 툭 튀어나온 것도 같은 성당 첨탑을 흔하게 보았다. 크로아티아의 '로빈(RovinJ)' 같은 경우도 그러한데 시간이 차곡차곡 축적된 듯한 풍경은 여행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2. 서울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한남대교를 강북 방면으로 걸어 건너다보면 왼편으로 한남 뉴타운 3구역이 보인다. 여기가 과연 서울인가 싶은 그 동네는 불특정 다수의 가난이 봄 산 진달래처럼 혼전만전 피어났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 없는 가난이 모여 살고 교회와 이슬람 사원이 마을을 이뤘는데, 최근 재개발 시공사가 선정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다. 3. 골목길은 갈피 없고 사방 경사가 가파르다. 저리 헐거운 건물..